[인터뷰]안정민 "이해 못받는 이들을 위하여"···고독한 목욕
[인터뷰]안정민 "이해 못받는 이들을 위하여"···고독한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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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3.2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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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민 작가. 2019.02.27. (사진 ⓒ국립극단
안정민 작가. 2019.02.27. (사진 ⓒ국립극단

이재훈 기자 = "잊히고 사라지는 역사 기록은 누군가가 정렬시키고 우열을 배분한 것이라 생각해요. 제가 하는 예술은 잊혀서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입을 붙여주는 것이죠. 발화하지 못한 것이 발화할 수 있게끔 만드는 거예요."

사라진 기억, 들리지 않은 목소리···. 주변부에 밀려나는 것들을 톺아보고 있는 차세대 극작가의 이름은 안정민(32)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군부독재 시기 민주인사 가족들이 머물러 '옥바라지'라는 수식이 붙은 골목 철거 사태를 다룬 '구본장 벼룩아씨'(2016), 제주 예멘 난민 문제를 살펴본 '이방인의 만찬-난민 연습'(2018) 등이 보기다.

24일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막을 내리는 연극 '고독한 목욕' 역시 마찬가지다. 안 작가가 글을 쓰고 서지혜가 연출한 이 작품은 1960~1970년대 인민혁명당 사건이 소재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 다수의 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이 검거됐다.

연극은 인혁당 사건으로 희생된, 과거 지식인이었으나 양봉을 한 아버지를 돌아보는 '송씨 아들'의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은, 한 가족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보편성은 개인으로부터 획득된다. 송씨 아들의 친구, 송씨의 지인들로 고통과 아픔은 확산되고 그것은 결국 사회의 슬픔이 된다.

"연극을 배우면서 고생을 해서 그런지, 주변부에 관심을 가졌어요. 중심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요." '고독한 목욕'은 '구본장 벼룩아씨' 작업의 '정신적인' 연장선상이다. 안 작가는 도시재생 관련 연구소에 근무할 당시 서대문형문소 옆 옥바라지 골목를 방문, 부서진 공간들을 목격했다. 이 골목을 위해 연대하던 예술가들을 만나 '구본장 벼룩아씨'를 작업했다. 그 때부터 안 작가의 '기억에 대한 화두' 찾기는 시작됐다.

"그저 알고만 있었던 '기억이라는 것은 개념적인 것만이 아니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됐죠. 그 말 자체를 체험하게 됐다고 할까. 기억을 하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도 사라지게 되더라고요. 국가와 도시에서도 재편이 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역사관의 차이로 어른들하고도 많이 싸우고요. 하하."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대표이자 연출가, 배우로도 활약 중인 안 작가는 미답의 영역을 맨손으로 헤쳐 왔다. 기성 연극인의 상당수는 역사를 다룰 때 개인을 배제한 사회적인 아픔에만 천착하거나, 비장함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안 작가는 다른 문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찾아내는 작업'이 재미있다는 그녀는 담백하게 역사를 풀어간다. 평범한 서사 전개 방식을 택하지 않고 기억과 현재, 사실과 가상을 뒤섞는다. 국립극단이 차세대 극작가를 소개하기 위한 '젊은극작가전'의 세 번째 작품이기도 한 '고독한 목욕'은 신파나 가혹을 피하면서도 확연하게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위로까지 안기는 묘를 발휘한다.

고문에 시달리는 장면들이 불시착한 것처럼 잠깐씩 삽입되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는 벌꿀의 날개 소리, 오래된 책의 접힌 모서리 등 송씨와 송씨 아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시를 낭송하듯 나열된다. 이번 작품에 목욕이라는 모티브를 가져온 것도 치유를 위해서다.

"기존에 피해자나 희생자들을 대할 때 스테레오 타입이 있잖아요. 스스로를 치유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고통에만 가득 차 있죠. 피해자가 정말 피해자로 굳어지는 거예요. 근데 행복을 위한 치유적인 노력과 행위는 누구나 늘 습관적으로 하잖아요." 이성과 감성을 결합한 '고독한 목욕'은 영적이면서도 신선해 반갑고 놀라고 벅찬 순간을 선사한다.

연극 '고독한 목욕'. 2019.03.23. (사진 ⓒ국립극단)
연극 '고독한 목욕'. 2019.03.23. (사진 ⓒ국립극단)

울산 출산인 안 작가는 어릴 때부터 인형극 등을 보면서 연극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서울대에서 미학과 철학을 공부한 것도 연극을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연극에서 '갈등이라는 것이 재료'가 되는 것이 흥미로웠다. 사회에서 큰일뿐만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에서도 갈등이 되는 지점을 파악하는 것이 습관인 안 작가에게는 '기억의 방'이 많은데 '고독한 목욕'에서도 이런 점이 녹아들어갔고 서 연출이 문을 열고 닫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해냈다. 

영국 왕립 스피치&드라마 중앙학교에서 공부를 한 뒤 돌아온 안 작가는 처음에는 영국과 다른 한국 연극판에서 문화충돌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특히 사람들 사이에서 호칭이 혼란스러웠는데 결국 '기존의 시각으로 호명하지 않기'가 안 작가의 원칙이 됐다. '고독한 목욕'의 송씨와 송씨 아들을 그저 피해자로만 호명하지 않는 것처럼.

현실과 연극적 상상을 결합한 '뉴다큐멘터리 작업'을 통해 실제와 가상의 균형을 실험 중인 안 작가는 "아무도 햄릿을 싫어하지 않지만 실제 길거리에서 햄릿을 만나면 다를 수 있다"며 웃었다. 그녀는 차기작으로 남성 중심의 탄생설화에서 여성 중심의 탄생 설화를 찾거나 짓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성북동에서 개와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안 작가는 앞으로 '피카추'의 모티브인 친칠라 그리고 새까지 함께 키우면서 '동물농장'에 출연하고 싶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 혼재할 수 없는 것들의 조화 그리고 다양한 상황의 입장을 고려하고 싶은 안 작가의 성향이 자연스레 반영됐다.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말이다.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해라."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장을 여는 문장이다.

상류층인 소설 속 화자 '닉 캐러웨이'에게 그의 부친이 건넨 충고다. 안 작가는 이 말을 가슴 속에 담고 있다. "이해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거나 이해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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