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발 도인'으로 온 꽃미남 피아니스트의 '쓸쓸한 품위'
'백발 도인'으로 온 꽃미남 피아니스트의 '쓸쓸한 품위'
  • 주택건설신문
  • 승인 2020.02.20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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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출신 피아니스트
롯데콘서트홀서 15년만에 내한 공연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 빈체로 제공) 2020.02.20.

영원한 것은 없다. 갈색 장발에 우수에 젖은 눈빛을 머금은 '꽃미남'이었던 크로아티아 출신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62). 15년 만에 내한한 그의 풍채는, 삭발에 가깝게 자른 백발을 얹은 도인의 면모였다.

19일 오후 롯데콘서트홀에서 들려준 그의 피아노 연주 역시 영원한 박제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고정된 해석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청자의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연주들이었다. 그런데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은 있었다. 바흐는 바흐가 아니었고 베토벤은 베토벤이 아니었으며 쇼팽은 쇼팽이 아니었다.

작곡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서 연주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으레 어떤 작곡가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특정 이미지가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바흐는 다층적 심오함, 베토벤은 견고함, 쇼팽은 투명함 등이다.

그런데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그 규격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흩트렸다. 바흐의 영국 모음곡 3번은 어딘가 덜컹거렸는데 단조로웠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은 다소 뭉툭했다. 쇼팽 뱃노래 F#장조는 치장이 화려했으며 쇼팽의 전주곡 c#단조는 광포했다.

놀라웠던 것은 그런에도 듣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이성적 판단에 따라 혹자는 불호를 내놓을 법하지만 곡마다 명장면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 빈체로 제공) 2020.02.20.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 빈체로 제공) 2020.02.20.

모든 순간이 하이라이트였던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가 마지막 연주였던 지라 감흥은 배가 됐다. 베르트랑의 산문시를 바탕으로 한 곡인데 텍스트의 정경을 따르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종이비행기를 탄 바람처럼 연주하다가도 허스키한 음성의 로커처럼 몰아치고, 엇박자의 리듬에 끌려 다니는 종종걸음을 치는 듯하다가 거침없이 내달리는 그의 타건은 '푸르른 밤' 같았다. 연주를 모두 끝내고 피아노 위에 있던 악보를 가지고 와 무릎 위에 펼치고 무엇을 확인하는 듯했는데, '정확했나'를 판가름하는 것이 아닌 '음, 그랬군'의 태도에 가까웠다.     

포고렐리치의 연주를 분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인 오후 7시30분부터 청중 입장이 시작됐는데 검정 비니를 쓰고 빨강 머플러를 두른 포고렐리치는 연주 시작 10분전인 50분까지 묵묵히 리허설을 했다.

리허설에서 얕은 숨을 내뱉었던 피아노 타건의 여운이 남아 있는 공연장 속에 파고든 그의 본음들은 자유롭게 비상했다. 그의 감성에 설득을 당한 순간, 다른 세계가 보였다.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 빈체로 제공) 2020.02.20.
이보 포고렐리치. (사진 = 빈체로 제공) 2020.02.20.

클래식음악 애호가인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애프터 다크'에는 늦은 밤 어두운 사무실에서 CD플레이어를 통해 포고렐리치가 연주하는 '영국 모음곡'을 틀어놓고 일을 하는 인물에 대해 "포고렐리치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놀리고 있다. 허튼 움직임이 없다"고 묘사한다.

서울 공연 직전 일본 공연에서 하루키를 만나기도 한 포고렐리치는 이날 그런 질주하는 모습을 내내 선보이지는 못했다. 나이가 든 연주자의 기교적인 부분이 예전보다 못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확하지 않은 타건을 무서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은 태도가 더 믿음직스러웠다. 

'천재라 불리며 광기 어린 연주'를 자랑하던 도발의 연주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등 세상의 풍파를 겪고 나이 들어 성숙했다, 는 식의 진부한 표현은 맞지 않다.

인생의 모든 것을 깨닫고 초월한 도인의 경지에 이르렀기보다,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그의 연주는 쓸쓸한 품위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다섯 번 가량의 커튼콜에서 우아한 뒷짐을 지고 인사만 했을 뿐 앙코르 연주가 없었기에 그 순도가 더 짙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우려로, 클래식음악계 내한공연이 잇따라 취소되고 있는 가운데 열린 귀한 공연이었다. 군데군데 객석이 비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예상치 못한 우울한 사회적 풍경 속에 점멸하는 기억이 됐다. 때론 삶의 순간들은 피아노 위 검고 흰 계단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돌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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