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은 왜 카자흐스탄까지 갔고 왜 이제 돌아왔나
홍범도 장군은 왜 카자흐스탄까지 갔고 왜 이제 돌아왔나
  • 주택건설신문
  • 승인 2021.08.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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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평양 출신, 39세 때 의병활동 개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에서 맹활약
연해주 거주하던 중 소련 의해 강제이주
카자흐서 병원 경비, 극장 수위장 근무

지난 15일 유해로 귀환한 홍범도 장군은 대표적인 평민 출신 의병장이자 독립군 대장이다. 홍 장군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설적인 활약을 한 인물이다. 홍 장군은 1868년 8월27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그는 15세에 평양감영 나팔수로 입영했다. 19세에 상관을 폭행한 뒤 황해도 수안군 총령에 있는 종이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이때 동학교도가 돼 착취하는 주인을 살해했다. 그러다 금강산 신계사의 지담대사를 만나 수도생활을 하면서 항일의식을 키우고 글을 익혔다.
홍 장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 것은 27세 때다. 그는 황해도 서흥의 김수협과 철령에서 왜군 10여명을 죽였다.

의병 활동은 39세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1907년 말 함경·평안도 일대의 포수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며 타격을 줬다.

이종익 기자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1922년 1월).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이종익 기자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에 참가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1922년 1월).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홍 장군은 1919년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1920년 6월에는 군무도독부, 국민회 독립군부대와 연합해 중국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했다.

이 승전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다. 봉오동 전투는 대규모 독립군 연합부대의 첫 승전으로 이른바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린다.

이어 홍 장군은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해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다. 그는 1922년 1월 극동민족대회에 고려혁명군 대표자로 참석해 레닌과 회견하고 권총을 선물 받았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특사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과 특사단 일행인 우원식 의원, 조진웅 배우가 14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열린 추모식 후 크즐오르다 홍범도 거리를 함께 거닐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021.08.15.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특사인 황기철 국가보훈처장과 특사단 일행인 우원식 의원, 조진웅 배우가 14일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역에서 열린 추모식 후 크즐오르다 홍범도 거리를 함께 거닐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021.08.15.

서로군정서 김승빈은 "홍 장군과의 첫 상봉에서 그의 체격이 과연 장대하고 성품이 인자하고 태도가 겸손하며 일처리에서 태도가 과단성이 있다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고려인 작가 김준은 농사를 짓고 있던 홍범도를 만나 "신장구척인 장수, 축지법하는 장수, 신출귀몰하는 장수로 알고 있던 홍범도는 과연 그런 기대에 부합했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레닌기치 신문사 기자 김기원은 "원래 신체가 튼튼하고 키도 크고(190㎝) 총을 잘 쏠 줄 알았기 때문에 의병들의 큰 위신과 신임을 얻었다"고 전했다. 그러던 홍 장군은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소련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극동지역 침략이 본격화되자 한인들의 스파이 활동을 경계했고 1937년 극동지역 한인들을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 장군도 1937년 연해주 지역 거주 중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5일 한국으로 봉환되기 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국군의장대에 의해 특별수송기(KC-330)로 모셔지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2021.08.15.
일제강점기 봉오동 전투 승리를 이끈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5일 한국으로 봉환되기 위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공항에서 국군의장대에 의해 특별수송기(KC-330)로 모셔지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2021.08.15.

홍 장군은 기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얀꾸르간 시르다리아 강 건너편의 사나리크 셀소비에트(카잘린스크 구역)로 이주했다. 이후 1938년 4월초 크즐오르다 도시구역인 크라스늬 고로독(붉은 구석) 60번지로 이사했다.
크즐오르다로 이주한 직후 홍 장군의 생활은 여유롭지 못했다. 그는 병원의 경비로 어렵게 일했다. 홍 장군 사정을 알게 된 고려극장 관계자들이 홍범도에게 매달 50루블을 받는 수직원(수위장) 자리를 만들어줬다.

홍 장군은 전용 건물이 없는 극장인 고려극장의 빈 창고에 모아둔 무대기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홍 장군은 1943년 10월25일 사망했다. 집 근처에 조성된 분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중앙공동묘지로 옮겨졌다.

15일 오후 특별기를 통해 서울공항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하기후 운구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2021.08.15.
15일 오후 특별기를 통해 서울공항에 도착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 하기후 운구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2021.08.15.

사망 8주기인 1951년 10월25일 분묘 봉분이 내려앉자 크즐오르다시의 고려인 인사들과 전우들이 '홍범도 장군 분묘수리위원회'를 조직해 성금(2000여루블)으로 철벽과 철로 된 비를 세웠다.

철비 앞면에는 '저명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 묘 1868년 8월27일 출생 1943년 10월 25일 사망', 뒷면에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하여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찌산 대장 홍범도의 일홈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 1951년 10월 25일 레닌기치 신문사 동인, 고인의 전우 및 시내 유지한 조선인 일동 건립'이라고 기록됐다.

홍 장군 묘를 옮기려는 시도는 북한에서 먼저 이뤄졌다. 북한은 1993~1994년께 홍 장군 유해를 봉환하겠다며 카자흐스탄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고려인 사회가 북측으로의 봉환을 거부했다.

이에 한국 정부 조사단은 1994년 9월께 홍 장군 묘소를 조사하고 카자흐스탄 정부 측과 유해봉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서거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 유해가 15일 저녁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송되어 임시 안치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안치식이 거행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021.08.16.
서거 7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홍범도 장군 유해가 15일 저녁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에 봉송되어 임시 안치되었다. 국립대전현충원 현충관에서 홍범도 장군의 유해 안치식이 거행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2021.08.16.

그러자 북한은 반발했다. 북한은 1995년 8월28일 평양방송을 통해 "홍 장군 유해봉환은 (남측의) 사기협작극이며 홍범도 열사의 고향이 평양이고 후손들도 평양에 있기 때문에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국 국가보훈처와 기업은 1996년 5월 홍 장군 묘역 정비사업 지원에 1만 달러를 투입해 홍 장군 흉상 주변에 3개 기념비를 건립하고 공원묘역을 단장했다.

이후에도 보훈처는 시설물을 보수하는 등 묘역 정비사업을 지원해왔다. 2017년 7월에는 묘소 실태조사 때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관계자 등과 면담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논의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4월9일 중앙아시아 순방 최종 보고 때 홍 장군 유해봉환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2019년 12월에 자국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홍 장군 유해를 보내겠다고 밝혔다. 이어진 협의 끝에 문 대통령은 지난해 3월1일 제101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홍범도 장군 유해봉환을 최초 발표했다.
하지만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방한이 코로나19 관련 상황으로 연기되면서 유해봉환도 연기됐다.

이에 북한은 또 홍 장군 유해를 평양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지난해 6월23일 "유해는 그의 고향인 평양에 안치돼야 한다"며 "카자흐스탄 정부도 북과 남이 통일된 이후에 홍범도의 유해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유해송환 책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년여가 지난 이달 카자스흐탄 대통령 방한이 성사됐다. 이에 따라 홍 장군 유해도 귀국길에 오를 수 있게 됐다.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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