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뺏겨도 아무 말 못하는 축구계[기자수첩]
그라운드 뺏겨도 아무 말 못하는 축구계[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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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8.2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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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로 기자

잼버리 파행을 막는 과정에서 한국 축구가 동원됐다. 잼버리 파행으로 국격이 실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공과 민간을 막론하고 전 국가가 동원된 상황에서 축구만 예외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 사태 와중에 축구계에 대한 배려는 찾을 수 없었다.

폭염과 부실 운영으로 2023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가 실패 위기에 직면하자 인기 케이팝 가수들이 등장하는 콘서트가 각국 참가자들의 불만을 잠재울 거의 유일한 해법으로 제시됐다.

잼버리 폐영식 겸 K-팝 슈퍼라이브 콘서트를 열 장소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프로축구 전북현대 홈구장 전주월드컵경기장이 거론됐고 이에 따라 전북-인천 간 FA컵 준결승 경기가 연기됐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 장소는 FC서울 홈구장인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바뀌었지만 FA컵 준결승은 이미 연기된 상황이었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 한국 축구 최강을 가리는 권위 있는 대회인 FA컵은 결국 축소되고 말았다. 전북과 인천, 제주와 포항은 8월9일 FA컵 준결승을 치르고 11월1일과 4일에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결승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번 잼버리 사태로 준결승은 11월1일에 치러지고 결승은 11월4일에 단판승부로 펼쳐지게 됐다. 축구팬으로서는 한 경기를 덜 즐기게 됐으며 4강에 오른 팀들은 단판으로 우승자를 가려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됐다.

왜 이렇게 축구계가 휘둘리게 됐을까. 근본적인 이유는 경기장 소유 주체가 지방자치단체라는 점이다. 전주월드컵경기장 소유 주체는 전주시, 운영 주체는 전주시시설공단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소유 주체는 서울시, 운영 주체는 서울시설공단이다. 프로축구단은 홈구장으로 쓰고만 있을 뿐 경기장을 운영하거나 관리할 수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경기장을 축구 경기 외에 다른 용도로 쓴다고 통보하면 구단으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평등한 구조다.

이렇다 보니 정부와 지자체는 갑, 구단은 을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프로축구단을 홀대해도 딱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잼버리 행사 장소로 차출하면서 올린 보도자료에 이 같은 정부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체부는 잔디 복원 예산을 확보했다고 홍보하면서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서울FC와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공식 문서에서 FC서울을 서울FC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이는 유럽 축구에서 수도를 연고지로 삼는 레알 마드리드를 마드리드 레알로, 헤르타 베를린을 베를린 헤르타로, 파리 생제르맹을 생제르맹 파리로, AS로마를 로마AS로 적은 것과 같다. 한국 축구에 대한 중앙 정부의 이해와 배려, 관심이 떨어진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로축구단이 이처럼 휘둘릴 때 한국 축구 행정을 대표하는 대한축구협회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볼멘소리가 적지 않다. 지난 3월 스포츠 도박 연루자들을 사면하려 했다가 된서리를 맞은 대한축구협회는 이번 사태 때 정부와 지자체 앞에서 납작 엎드렸다. 유감스럽다거나 사태 재발을 막아달라는 짧은 발표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번 사태 내내 입을 꾹 다문 대한축구협회를 향해 축구인들의 성토가 이어지고 있다. 축구 경험이 없는 문체부 차관 출신 인사가 지난 5월부터 상근 부회장을 맡고 있는 것이 이번 사태와 무관치 않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번 일련의 사태를 통해 국가를 위해 스포츠계는 언제든 희생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시각, 스포츠계와 선수들을 얕보는 권위주의적인 시각도 다시 한 번 드러났다. 결국 축구계가 이번과 같은 수모를 겪지 않으려면 정부나 지자체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상을 갖출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가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 벌어졌다면, 그래서 잉글랜드 정부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구장인 올드트래포드를 잼버리 공연장으로 쓰겠다며 FA컵 경기를 연기하라고 압박했다면 과연 잉글랜드와 전 세계 축구팬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K리그도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 압도적인 자금력을 자랑하는 사우디 리그처럼 호날두나 네이마르 등 스타들을 돈으로 영입하든지,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처럼 리오넬 메시가 자신의 마지막 무대로 선택할 만큼 매력적인 리그로 거듭난다면 더 이상 예전처럼 무시는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안타까운 점은 현재로서는 이 같은 해결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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